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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계급의 '캐주얼스'와 프레드 페리 02

Dresser 2017. 9. 12. 02:13

※ 이 글은 일본 VICE 매거진의 아티클을 번역한 것입니다. 오역과 의역이 다수 있을 수 있습니다.


노동자 계급의 '캐주얼스'와 프레드 페리 02


90년대 스포츠 스타일을 대표하는 대표하는 아이코닉 아이템인 버킷 햇. 당시의 로고를 사용하고 비바람에 강한 마무리가 되어있다. FRED PERRY 공식사이트 Art Work By Shinryo Saeki 자료 제공: Casual State of Mind


당시의 테니스 웨어 아카이브를 바탕으로 블랙 바디에 90년대 스타일로 제작된 나일론 재킷. FRED PERRY 공식사이트 Art Work By Shinryo Saeki 자료 제공: Casual State of Mind


영국의 많은 서브 컬쳐에서 사랑을 받아온 프레드 페리. 스포츠 웨어를 거리로 퍼뜨린 캐주얼스. 80년대 영국 사회에 엄청난 영향력을 기친 대처 정부. 전의 글에선 브랜드, 서브 컬쳐, 사회 정세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번 글에서는 이들이 어떻게 교차하였으며, 80년대 일어난 현상이 어떻게 90년대 초반과 현대에 영향력을 미치는지에 대해 소개한다.


사진집『A Casual Look: A photodiary of Football Fans 1980’s to 2001』에서


사진집『A Casual Look: A photodiary of Football Fans 1980’s to 2001』에서



대처 정부는 자유 경쟁을 촉진하기 위해 규제 완화와 민영화를 추진하여 복지 국가를 해체했다. 이를 통해 노동자 계급에서는 실업자가 속출했다. 노동자 계급에서 태어난 캐주얼스는 억압받는 환경에서 무엇을 느끼고 행동했을까. 그리고 왜 축구와 패션에 열광했을까.
『i-D』의 데클란 히긴스(Declan Higgins)는 "대처의 정책에 따라 길은 쓰레기투성이었으며, 전력 공급은 안정적이지 않아 정전이 자주 일어나는 등 그 영향력은 영국 전역에 미쳤지만, 특히 노동자 계급에 타격이 컸다. 그러나 노동자 계급의 캐주얼스는 돈이 없더라도 옷차림을 중요시했다. 고급 옷을 구매하더라도 정식 매장에서 구매한 제품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들은 저축을 통해 옷을 사는 행위 자체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옷은 그들의 결속을 나타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ICA(런던의 현대 미술관)의 커뮤니케이션 부에서 근무하며, 런던 예술 대학 강사, 프리랜서 작가이자 편집자인 다리오슈 하지-나자피(Daryoush Haj-Najafi)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캐주얼스와 대처의 관계는 2가지가 있다. 하나는 캐주얼스는 물질주의이다. 80년대 초의 스팬도 발레나 듀란 듀란과 같은 밴드는 펑크가 내건 반물질주의를 부정했다. 마찬가지로 캐주얼스는 허무주의(니힐리즘)적이고 쾌락주의적이었다. 자본주의를 부정하고 파업을 일으켜 투쟁했던 많은 노동자 계급은 캐주얼스를 통해 인생을 즐기고자 했다. 즉, 캐주얼스의 허무주의는 노동자 계급의 혁명이라는 목표보다는, 세련된 유럽의 풍요로움을 동경하는 환상 속에 사는 것에 매력을 느낀 청소년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결국, 영국에서 노동자들의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으며, 노동조합은 힘을 잃고 일자리는 줄어들었다.
또한, 캐주얼스는 외국 문화에 큰 관심을 가졌다. 당시 우익 스킨 헤드는 애국을 호소했지만, 캐주얼스는 영국은 세계 최고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스킨 헤드의 마인드를 부정했다. 영국의 브랜드도 많이 입었고 그 중에는 우파도 많이 있었지만, 그들은 외국에 흥미를 느끼고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요소를 찾으려 했다."
대처 정부에서 노동자 계급이 일자리를 잃는 가운데, 대처가 내세우는 물질적 유복함과 직접 싸우지 않고 오히려 그에 호응하듯 전통적인 노동자 계급으로서의 미덕을 거부한 것이다. 그리고 유럽 다른 국가의 생활을 동경하며 그것을 패션으로 구체화했다. 계급은 평생 바꿀 수 없지만, 옷차림은 바로 바꿀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상징이 비싼 스포츠 웨어였다.
다리오슈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정부에서 준 공공 주택에 살면서 할아버지, 아버지와 같은 공장에서 일하다 결혼하는 노동자 계급의 생활을 캐주얼스는 깨고 나왔다. 그 수단으로 그들은 다른 세계를 바라보았다. 공장의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지 않아도, 공공 주택에 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90년대 일본에서 그랬듯, 좌파는 종신 고용 제도를 긍정했다. 반면 캐주얼스는 아르마니와 수천 파운드짜리 스톤 아일랜드 재킷을 입는 생활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는 곳과 일자리가 정해진 삶이 아닌 자유를 찾았다."
캐주얼스에서 빠뜨릴 수 없는 문화가 바로 축구이다. 대처 정부 아래에서 노동자 계급의 직업과 존엄, 정체성이 파괴되었지만 단 하나 남은 것이 축구였다. 노동자 계급과 캐주얼스에게 축구는 빼놓을 수 없는 엔터테인먼트였다. 당시의 축구 환경을 영국 『GQ STYLE』의 에디터 딘 키식(Dean Kissick)에게 물었다. "당시 축구는 노동자 계급의 것으로 여겨졌다. 계급이 명확하게 나누어져 있던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데이비드 베컴, 스티븐 제라드, 웨인 루니와 같이 거의 모든 인기 선수는 노동자 계급 출신이었다. 오히려 다른 계급 출신 선수가 화제가 될 정도였다. 80년대의 축구 문화가 노동자 계급의 스포츠 문화였는지는 몰라도, 비참한 사건이 발생한 시기이기도 했다. '헤이젤 참사'와 '힐즈버러 참사'와 같은 커다란 사건이 발생하고 많은 사람이 사망하여, 훌리건에게 그 책임을 묻는 어두운 시대이기도 했다."
힐즈버러 참사는 리버풀과 노팅엄 포레스트의 1989년 FA컵 준결승에서 일어났다. 당시 경비를 서고 있던 경찰관이 이미 스탠드가 만원이었음에도 입장 규제를 게을리한 결과, 테라스에 서포터가 지나치게 들어차서 96명의 서포터가 압사하고 말았다. 분명한 경찰의 과실이었지만 당시 그들은 그것을 악명 높은 훌리건의 탓이라고 주장했다. 사건 발생 후 20년 이상이 지나 마침내 책임이 경찰에 있음이 밝혀졌다. 이러한 축구를 둘러싼 환경이 크게 변화한 것이 1992년이다. 이 해에 출범한 프리미어 리그는 모든 경기를 TV 방송하면서, 그 중계권으로 엄청난 이익을 얻었다. 그리고 현재 축구는 노동자 계급과 그 지역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다. 맨체스터와 리버풀, 뉴캐슬 등 북부 대도시의 팀은 여전히 노동자 계급의 팬 기반이 지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이제는 계급과 지역을 뛰어넘어 모든 배경의 사람들이 경기장에 모이고,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들기 시작했다.


사진집『A Casual Look: A photodiary of Football Fans 1980’s to 2001』에서


사진집『A Casual Look: A photodiary of Football Fans 1980’s to 2001』에서



그런 노동자 계급을 위한 스포츠였던 축구가 테니스를 시작으로 모드를 비롯한 음악과 결합한 서브 컬쳐의 사랑을 받은 프레드 페리와 어떻게 연결된 것일까. 물론 다양한 색상의 폴로 셔츠를 출시하여 지역 축구팀의 상징 색상의 폴로 셔츠를 구매했다는 이유도 있지만, 결정적인 요인은 캐주얼스였다.

딘은 "캐주얼스가 원했던 것은 더 문화적으로 고급스러워 보이는 스타일이었다. 그래서 전통적인 브랜드의 아이템을 선호했다. 당시 프레드 페리는 테니스와 연관 있으며, 더 나이 든 사람을 대상으로 한 부유한 중산층의 옷이라는 이미지가 있었다. 결코, 축구 브랜드는 아니었지만 캐주얼스는 프레드 페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라고 이야기한다.
다리오슈는 "프레드 페리의 슬림핏은 새로움의 상징으로, 모드에게는 필수적인 아이템이었다. 티셔츠가 속옷으로 간주하던 50년대에 폴로 셔츠는 마치 오늘날의 크롭 탑처럼 파격적인 스타일로 도시를 걷는 느낌이었다. 프레드 페리가 그것을 보급하고, 영국의 젊은이 문화에 침투시켰다. 이후 60년대 후반에 모드는 스킨 헤드로 변화하고 자메이카 등 흑인 문화를 받아들인다. 자메이카나 흑인 문화에서는 클락스 신발과 캉골 모자 등 영국의 브랜드를 선호했기 때문에 프레드 페리 역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프레드 페리는 노동자 계급에 뿌리를 두면서도, 동시에 세련된 스타일로 동경의 대상이라는 상반된 요소를 갖췄다. 백인과 흑인을 불문하고 모든 인종, 모드와 캐주얼스 등 다양한 청소년 문화에 수용됐다. 그런 프레드 페리는 축구 팬의 캐주얼스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브랜드가 되었다. 항상 음악 그리고 청소년 문화와 결부되어 다른 것들보다 조금 비싸고 좋은 것이라는 이미지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캐주얼스는 축구를 프레드 페리를 연결하여 거리에서 운동복을 입는 스타일을 일반화시켰다. 이러한 움직임은 80년대 후반에 일어난 애시드 하우스와 레이브 문화로 이어진다. '보이즈 오운(Boy's Own)'과 같은 애시드 하우스와 축구, 패션을 주제로 한 팬진의 존재는 이를 증명한다.
데클란에 의하면 "90년대라고 하면 애시드 하우스, 개인적으로는 맨체스터의 아시엔다(Hacienda)라는 클럽이 인상적으로 남아있다. '보이즈 오운' 등의 팬진은 캐주얼스 문화와 애시드 하우스 무브먼트, 테라스 문화와 나이트클럽 댄스 플로어를 결합했다. 테라스에서 경기를 보던 젊은이들이 토요일에는 나이트클럽에서 엑스터시를 하고, 애시드 하우스를 들으며 춤추고 있었다."


'보이즈 오운'의 에디터 테리 팔리(Terry Farley)가 캐주얼스에 대해 영향을 받은 '디 엔드(The End)'라는 팬진이 있었다. 80년대 초반 리버풀의 축구, 팝, 술, 약물, 좌파 정치, 그리고 패션의 경계선을 모호하게 파괴적인 방법으로 표현했다. 편집자 피터 후톤(Peter Hooton)은 훗날 90년대 인디 춤의 원형인 밴드 The Farm의 메인 보컬로 유명했다. Photo By Yohei Miyamoto 자료 제공: CLOSER


다리오슈에 따르면 "캐주얼스는 70년대부터 80년대에 뿌리내린 문화로, 80년대 후반과 90년대의 스포츠 웨어 열풍의 원인이 되었다. 다만 캐주얼스와 애시드 하우스는 분명 다른 개념이다. 확실히 '보이즈 오운' 같은 팬진 에서는 테라스의 은어나 캐주얼스 등과 함께 애시드 하우스 역시 게재하고 있었지만, 이것은 애시드 하우스의 시작 정도로 보아야 한다. 애시드 하우스와 레이블이 등장한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까지 캐주얼스의 스타일은 쇠퇴했다. 88년에 폭발적으로 퍼진 레이브가 캐주얼스 문화를 쇠퇴시켰다고 해도 좋다. 엑스터시가 캐주얼스를 끝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레이브와 애시드 하우스 이전에 캐주얼스가 스포츠 웨어를 거리로 퍼뜨리며, 90년대 문화에 영향을 준 것은 틀림없다." 그렇다.
90년대 초반의 레이브 문화로 대표되는 영국의 패션은 컬러풀한 오버 사이즈의 스포츠 웨어가 유행이었다. 또한, 힙합, 스케이트보드, 스노보드 등의 유행과 더불어 스포츠 웨어가 더더욱 빼놓을 수 없는 아이템이 되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영국에서는 모드가 프레드 페리를 애용하면서 캐주얼스가 프레드 페리를 축구 문화에 뿌리내리고, 또 저지와 운동화 등의 스포츠 웨어를 거리에 입고 나오며 90년대 스포츠 스타일의 비약으로 연결되어 간 것이다.


사진집『A Casual Look: A photodiary of Football Fans 1980’s to 2001』에서


대처 정부의 억압을 받는 노동자 계급. 그 안에서 축구와 패션이 합쳐진 서브 컬쳐 움직임인 캐주얼스가 탄생했다. 캐주얼스는 과거 노동자 계급의 생활을 거부하고, 유럽에 대한 동경을 바탕으로 스포츠 웨어를 착용하여 구태의연한 생활에서 벗어난다는 의지를 표현했다. 이 의지 표현의 상징이 스포츠 웨어를 거리에서 입는 것이었고, 그 패션이 일반화되어 애시드 하우스나 레이브 문화를 중심으로 한 90년대의 스포츠 스타일에 대한 유행으로 이어졌다.
현재 영국에는 캐주얼스가 꿈꿨던 세계가 현실이 된 것처럼 계급의 개념이 희박해지고 있다. 하지만 경제 상황은 더욱 악화하고, 그것이 이민 문제와 연결된 결과 영국은 EU에서 탈퇴했다.
영국의 현실에 대해 딘은 이야기한다.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노동자 계급과 상류층 모두 이전보다 훨씬 줄어들어 나라 전체가 중산층이 됐다. 당시 총리였던 토니 블레어가 "우리는 모두 중산층이다"라고 말한 그대로 되었다. 직장이나 사회의 변화 속에서도 과거 노동자 계급은 중공업이나 공장 등의 특정 산업의 끈을 잡고 있었지만, 현재 영국에는 그런 일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은 과거 가장 돈과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런던의 상류 계급보다, 중산층의 노동에 해당하였던 금융과 부동산 업계의 사람들이 더 부유할 것이다. 즉, 과거의 상류층도 망해가고 있다. 계급의 문제가 완화됐지만 새로운 문제들도 발생하고 있다. 바로 이민자 문제이다. 과거 노동자 계급에 그랬듯이, 일자리 감소와 불경기에 따른 소득 감소 등 사회 모든 문제의 책임을 이민자에게 떠밀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현재 영국 패션 업계에 대해 다리오슈는 이렇게 분석한다. "지난 5년의 큰 흐름으로 중산층이 노동자 계급과 유사한 모습을 하게 되었다. 부잣집 젊은이들이 길거리 젊은이들의 거친 스타일을 선호하게 되었다. 하지만 노동자 계급이 스트리트 웨어를 입는 것은 자신의 강함을 나타내어 싸움에 휘말리지 않기 위함이었다. 폭력 사태에 말려들지 않도록 옷을 통해 이미지를 만들어내야만 했다. 부유층은 자신을 지킬 필요가 없음에도 스트리트 패션을 선호하는 기묘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지금의 대중문화에서 부유층의 젊은이는 자신이 부유하게 보이는 것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올 시즌 프레드 페리와 콜라보레이션을 발표한 팔라스(Palace)의 전속 모델/스케이터인 블론디 맥코이(Blondey McCoy)의 템스 런던(Thames London)도 캐주얼스를 방불케 하는 아이템을 출시했다. 팔라스는 엄브로를 시작으로 리복, 아디다스와 차례로 협업을 실현하고 있다. 오늘날의 스트리트 스타일은 캐주얼스를 기반으로 하는 90년대 초반의 스포츠 스타일로 돌아가고 있다. 프레드 페리는 그것을 구체화하기 위해 모노크롬 테니스라는 캡슐 컬렉션에서 당시의 스타일과 로고를 기반으로 재해석하는 아이템을 출시했다.
캐주얼스가 과거의 노동자 계급을 거부하고 새로운 시대에 대한 동경을 모색하고 그 정신을 패션에 담아낸 것과 같이, 그에 대한 좋고 나쁨은 제쳐두고, 패션은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자주 이야기한다. 영국의 EU 탈퇴, 트럼프 대통령의 아메리카 퍼스트 등 세계화에 반하는 민족주의적인 사상이 만연하는 시대에 프레드 페리가 내놓은 90년대 스포츠 스타일은 마치 베를린 장벽이 붕괴하며 세계화과 가속화된 90년대에 대해 생각하는 것 같다.
노동자 계급의 '캐주얼스'와 프레드 페리 01는 여기.


90년대 당시 클래식 로고가 전면에 들어간 티셔츠와 스웨트 셔츠. FRED PERRY 공식 사이트 Art Work By Shinryo Saeki 자료 제공: Casual State of Mind


고전적인 느낌의 핀 스프라이트 무늬의 저지 소재 트랙 수트. FRED PERRY 공식 사이트 Art Work By Shinryo Saeki 자료 제공: Casual State of Mind


Art Work By Shinryo Saeki 자료 제공: Casual State of M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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