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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대 뒤 이야기

노동자 계급의 '캐주얼스'와 프레드 페리 01

jiyouuu 2017.09.11 23:56

※ 이 글은 일본 VICE 매거진의 아티클을 번역한 것입니다. 오역과 의역이 다수 있을 수 있습니다.


노동자 계급의 '캐주얼스'와 프레드 페리 01

Art Work By Shinryo Saeki 자료제공: Casual State of Mind


프레드 페리가 90년대에 사용했던 로고가 들어간 코튼 캡. 전통적인 조절 스트랩 대신, 신축성 있는 골(rib)를 사용했다. Art Work By Shinryo Saeki 자료 제공: Casual State of Mind


90년대 스트리트 스타일을 상징하는 코치 자켓. 착용감이 부드러운 저지 소재의 아이템. Art Work By Shinryo Saeki 자료 제공: Casual State of Mind


영국에서의 서브 컬쳐를 이야기할 때, '계급 사회'와 '시사 정치'를 빼놓을 수 없다. 사회 분위기와 시대 배경 속에서 억압 받은 노동자 계급, 그 중에서도 10대들에 의해 음악과 패션이 구현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계급과 인종의 울타리를 넘어 거의 모든 대중 문화에서 아이코닉한 존재가 된 프레드 페리. 어떻게 백인과 흑인 모두에게 사랑받는가. 상류층과 모드(mods), 스킨헤드 등 다양한 서브 컬쳐에서 수용하고 있는가.

패션 잡지 『i-D』, 영국 『GQ STYLE』에 종사하는 에디터의 도움을 받아, 영국 문화와 프레드 페리의 캡슐 컬렉션 '모노크롬 테니스'가 내놓은 90년대 믹스 스타일을 규명하기 위해서 '캐주얼스"에 초점을 맞추고 총 2회에 걸쳐 소개할 예정이다.



젊은 날의 프레데릭 존 페리. 그는 플레이보이로 유명했으며, 여배우와 모델 등 총 4번의 결혼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먼저 프레드 페리의 행보를 복습해보자. 1909년생인 프레데릭 존 페리(Frederick John Perry)는 1928년 탁구 세계 챔피언의 자리에 오른 뒤 테니스로 전향하였고, 1934년 윔블던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지만, 테니스의 계급 차별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는 방직업에 종사하는 노동자 계급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1940년대 후반 은퇴한 뒤, 자신의 이름을 딴 '프레드 페리'를 만들면서 상황이 호전된다. 윔블던의 상징인 월계수를 모티브로 한 로고 사용이 허용된 것이다. 테니스가 상류 계급만을 위한 스포츠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집요한 편견에 끊임없이 도전하여 얻어낸 결과였다.

이를 계기로 프레드 페리는 테니스 웨어뿐만 아니라 전 세계 거리에 받아들여질 수 있는 행보를 시작한다.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이 손목 아대였다. 그다음 전 세계 스트리트 패션의 아이콘이 된 폴로 셔츠를 선보인다. 가장 큰 특징은 슬림한 핏. 이것이 50년대 후반 등장한 모드 족(Mods)의 사랑을 받는 계기가 된다. 모드는 슬림한 것이 기본 스타일이었고, 거기에 정확하게 부합했기 때문이다. 또한, 밤새도록 춤을 추고 놀아도 망가지지 않는 튼튼한 카노코 소재를 사용한 것도 인기를 끌었던 이유였다.

60년대 등장한 '스킨 헤드'는 부츠와 데님, 멜빵과 함께 프레드 페리의 폴로 셔츠를 선택했다. 그들은 모드에서 파생된 노동자 계급의 서브 컬쳐로서 축구를 매우 사랑했다. 시즌 개막 즈음이 되면 각 지역의 팀 컬러에 맞게 선택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색상의 셔츠를 출시하고 했다.


네오 모즈를 이끈 The Jam의 폴 웰러. 프레드 페리를 사랑한 셀러브리티 중 가장 먼저 이름이 거론되곤 한다.


70년대 후반, 다양한 움직임이 탄생한 펑크 씬에서는 노동자 계급의 젊은이들이 결성한 The Buzzcocks, Sham69 등이 프레드 페리를 애용했다. 또한, 영화 콰드로페니아(Quadrophenia, 1979)가 개봉하며 네오 모드의 아이콘이 되었다. 맨체스터의 모드 계보에서 탄생하여 노던 소울(Northern Soul)과 축구를 즐기던 '페리 보이즈'는 당연하게도 프레드 페리를 사랑했다. 1979년 페리 보이즈의 트렌드는 훗날 '캐주얼스'의 기원으로 이어진다. 자세한 것은 뒤에 나오지만 캐주얼스는 7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에 등장한 스포츠 웨어를 중심으로 한 스타일의 움직임이다.

80년대 초반에는 2톤 스카의 유행에 따라 스킨 헤드 스타일을 답습하고, 포크 파이 모자, 정장, 로퍼에 프레드 페리를 입는 스타일이 유행한다. The Specials는 노동자 계급의 백인과 흑인이 결성한 밴드였으며, 그들은 모두 폴로 셔츠를 애용했다.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에는 애시드 하우스, 레이브 컬쳐와 같은 청소년 문화가 등장한다. 그 이후 영국의 커다란 서브 컬쳐 무브먼트는 아직 없다. 그러나 프레드 페리는 그 이후의 브리티시 팝, 2000년대 이후 라프 시몬스와의 협업 등에서 알 수 있듯이, 메이저 씬과의 연계와 모드 씬과의 협력을 통해 더 많은 사람을 매료시키는 브랜드로 성장해나간다.

그런 브랜드가 이번 시즌에 내놓은 것은 모노크롬 테니스. 90년대 스포츠 스타일을 내세운 이 캡슐 컬렉션을 해독하기 위해서는 70년대 후반 탄생하여 80년대에 전성기를 누리고, 90년대 애시드 하우스와 레이브 문화에 큰 영향을 준 캐주얼스 문화를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


80년대의 캐주얼스가 사랑한 아이템이 망라된 사진집 『80s CASUALS』(80scasuals.co.uk). Photo By Yohei Miyamoto 자료 제공: CLOSER


2003년 설립되어 축구 팬 젊은이를 대상으로 한 최초의 의류 브랜드가 출판한 사진집 『80s CASUALS』(80scasuals.co.uk). Photo By Yohei Miyamoto 자료 제공: CLOSER


80년대의 캐주얼스 스타일에서 2001년 축구 팬의 스타일까지를 담은 사진집 『A Casual Look: A photodiary of Football Fans 1980’s to 2001』. Photo By Yohei Miyamoto 자료 제공: CLOSER


사진집『A Casual Look: A photodiary of Football Fans 1980’s to 2001』에서


사진집『A Casual Look: A photodiary of Football Fans 1980’s to 2001』에서


70년대 후반에 탄생한 '캐주얼스'. 축구 팬의 패션이 영국 전역에 확산하면서 주목 받는 움직임이 되었다. 그 스타일의 특징은 트랙 수트(저지)나 나일론 재킷, 트레이닝복, 운동화, 모자 등 스포츠 웨어를 중심으로 한다. 지금은 거리에서 트레이닝복을 착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프레드 페리의 폴로 셔츠를 제외하고는 영국에서 스포츠 웨어 패션이 중심이 된 적은 없었다. 이 문화에 대해서 영국 『GQ STYLE』의 에디터 딘 키식(Dean Kissick)은 "캐주얼스가 특이한 점은 대부분의 축구 팬은 팀 컬러에 맞는 유니폼을 입고 있지만, 캐주얼스는 누구보다 하드코어 팬임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인 유니폼을 입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느 팀의 팬이든 모두 비슷한 모습을 한 것이 특징이다."라고 이야기한다.

또한, 『i-D』의 데클란 히긴스(Declan Higgins)는 "테라스(골대 뒤의 좌석이 없는 입석 구역) 문화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2000년대 후반 내가 자란 지역에서는 캐주얼스가 유행이었다. 14살 때, 친구들은 스톤 아일랜드와 리바이스 청바지, 스탠 스미스, 리복, CP 컴퍼니, 프레드 페리 폴로 셔츠 등을 구매했다. 버버리와 아큐아스쿠텀도 매우 인기가 있었다. 음악은 조이 디비전, 오아시스, 데이비드 보위 등을 들었다."라고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해주었다.

ICA(런던의 현대 미술관)의 커뮤니케이션 부에서 근무하며, 런던 예술 대학 강사, 프리랜서 작가이자 편집자인 다리오슈 하지-나자피(Daryoush Haj-Najafi)는 이렇게 말한다. "영국 사회는 매우 계급을 중시한다. 70년대 축구는 노동자 계급을 위한 스포츠였다. 공장에서 일하는 젊은이들이 많았지만, 매우 가난한 것은 아니었다. 원래 축구는 돈이 드는 취미였고, 캐주얼스는 유럽 각지에 관람을 갈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다만, 범죄자이거나 싸움이 났을 때 경찰로부터 눈을 피하고자 했던 무리도 있었다. 그들이 경찰에게 의심을 받지 않는 스타일을 한 것이 캐주얼스의 출발이다.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당시 유행했던 글램 룩과 스킨 헤드, 히피 문화에 대한 반발도 있었다. 특히 축구를 사랑했던 스킨 헤드는 이미 경찰의 감시를 받았기 때문에 부츠와 청바지 대신에 트레이닝복과 운동화를 신고 경기장에 간 것이다. 청소년 문화는 기본적으로 기존 스타일에 대한 반발이다. 캐주얼스나 스킨 헤드뿐만 아니라, 모드와 펑크도 주류의 스타일을 거부하며 태어났다. 70년대 초에 거리에서 트레이닝복을 입는 것은 매우 특별한 아웃사이더였다. 이것을 폭발적으로 파급시킨 것이 캐주얼스였다."

그의 이야기에서 한 가지 특별한 점은 당시 스킨 헤드와 캐주얼스 등 모두에게 사랑받은 프레드 페리의 존재이다. 또한 캐주얼스 문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 남성 특유의 미학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억압적인 노동자 계급에서는 '이 일을 하며 살면 절대 거물이 될 수 없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면 길은 두 가지만 남게 된다. 지성을 갖추고 노동자 계급에서 벗어나거나, 범죄자가 되거나. 이것은 힙합 문화와 유사하다. 캐주얼스에서는 여성을 찾아보기 어렵다. 내가 10대일 때 "오늘 여자를 꾀지 못하면 싸울 거야"라고 말할 정도로 모두 싸움을 즐기고 있었다. 또한 '여성스럽지 않다'라는 이유에서 '패션을 좋아하는 것'도 힙합 문화와 마찬가지이다. 영국의 80년대에도 같은 현상으로서, 축구에 얽히고 터프함을 내세운 패션이 바로 캐주얼스인 것이다.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성차별적이지만, 남성의 패션 문화는 오랫동안 그런 것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바디 체스트 백이다. 지금은 바디 백을 가진 남성이 많지만, 예전에는 누구도 가지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범죄자가 가지고 다니는 것', '총을 넣는 것'이라는 이미지가 생기는 순간 모두가 슬링 백을 가지고 싶어 했다. 원래 남성은 예로부터 반항적인 스타일을 통해 터프하게 보이고 싶어 했다."

다만 여기서 분명하게 해야 할 것은 캐주얼스와 훌리건, 그리고 차브(Chav)의 차이이다. 모두 축구와 관련된 것이지만 서로 다른 의미이다. 훌리건은 축구장에서 싸움이나 폭동을 일으키는 사람을 가리킨다. 차브는 90년대 이후 캐주얼스의 패션을 흉내 낸 사람을 가리킨 말이지만, 현재는 노동자 계급 중에서도 더 하위 계층을 가리키는 말로 변화하고 있다. 그리고 캐주얼스는 어디까지나 스트리트 패션 스타일을 지칭하는 것이다. 같은 영국 축구 팬이라는 의미에서는 공통적이지만, 그 행동과 입장에 의해 뜻이 나뉜다.

캐주얼스와 차브의 차이에 대해 다리오슈는 설명해주었다. "캐주얼스는 차브를 싫어했다. 차브는 계급 차별을 뜻하는 나쁜 말이지만, 정작 이 말을 만든 것은 같은 노동 계급이었다.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에 등장한 차브는 캐주얼스의 모습을 흉내 내지만, 대부분 생활 보장을 받는 매우 가난한 이른바 '언더클래스(underclass)' 사람들이었다. 캐주얼스는 스스로 부자처럼 보이도록 명품을 입고, 패션에 대한 이해가 있다고 생각했다. 20~30년 뒤 이 스타일을 흉내 낸 중산층 사람들인 차브는 마치 펑크 패션에서 그러했듯이 '미움받을 것을 알면서 굳이 착용'한 것도 있었다. 캐주얼스는 그 스타일을 매우 아꼈지만, 최근 이 스타일이 부흥하는 것을 금기처럼 취급했다. 몇 년 전 차브 스타일처럼 트랙 수트와 버버리 모자를 착용하는 것은 주변 사람들을 화나게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캐주얼스가 처음 입었을 때는 자신들이 세련된 스타일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캐주얼스와 차브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또한, 캐주얼스와 훌리건의 차이에 대해 딘에게 물었다. "훌리건은 싸움이다. 경기장에서 다른 팀을 응원하는 라이벌 집단과 싸우는 것이 훌리거니즘이다. 캐주얼스에게는 그것보다 복장이나 생활이 중요하다. 두 개념은 겹치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 캐주얼스 중에 훌리건도 있고, 훌리건 중에 캐주얼스도 있다." 당연하지만, 영국 내에선 뚜렷하게 다른 개념으로 인식되고 있다.

캐주얼스의 발생 지역에 대해서는 맨체스터와 리버풀, 두 가지의 설이 있다. 맨체스터 근처의 크루(Crewe)라는 마을에서 자란 데클란은 "맨체스터에서 기차로 20분 거리의 마을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페리 보이즈와 함께 자랐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페리 보이즈는 1979년경에 태어난 스타일로, 주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팬이다. 그들은 자기표현을 위해서 패션이나 스타일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머리는 웨지 컷으로 잘랐으며, 유럽의 스포츠 웨어를 입고, 스탠 스미스를 신었다. 특히 프레드 페리 폴로 셔츠는 페리 보이즈의 상징이었다. 토요일 경기가 끝난 뒤 바로 나이트클럽에 가야 했기 때문이다. 경기장에서는 다른 팬과 싸우고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그다지 폭력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외모에 대해 더 신경 쓰고 있었다." 페리 보이즈에서 파생하여 캐주얼스가 태어났다는 것이 맨체스터 설이다.

한편, 리버풀의 축구 팬들에 의해 캐주얼스 문화가 시작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당시 최강이었던 리버풀 FC가 유럽 챔피언십에 출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팀을 따라 유럽 전역을 여행하며 각지에서 다양한 스포츠 웨어를 구매하고, 때로는 훔쳐가면서도 스타일을 확립했다는 것이 리버풀 발상설이다.

어쨌든 70년대 후반 잉글랜드 북서부의 축구 팬들 사이에서 캐주얼스는 탄생했다.

10대 시절 중국계 슈퍼마켓에서 만난 친구들에게서 축구 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처음 패션에 빠졌다는 다리오슈의 이야기를 통해 캐주얼스의 변천에 대해 들을 수 있다.

"70년대에 자주 입던 브랜드는 프레드 페리, 세르지오 타키니, 라코스테, 버버리 등이었다. 당시 버버리는 지금보다 저렴했고, 라코스테가 훨씬 비쌌다. 미디어에서 많이 소개되지 않는 브랜드에 대해 알아내고, 지식을 겨루는 것도 남성 문화의 특징이었다. 또한, 60~70년대 들어 기술력을 강조한 운동화가 늘어났다. 남성 문화에서 옷의 기술력을 중시했다는 점도 이해해야 한다. 80년대가 되며 이탈리아에서 뛰어난 기술력을 적용한 스톤 아일랜드가 등장하고, 아르마니 청바지도 큰 유행이었다. 그러나 잉글랜드 북부에는 90년대 초반까지도 그런 브랜드를 취급하는 가게가 거의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고향과 고향 사람들, 출신 계급을 사랑하는 동시에 그들의 지식에 대한 욕망을 자극하는 외국을 동경하고 있었다. 캐주얼스의 스타일은 남성 패션 문화를 구현하면서, 시간과 함께 변화하며 길거리에 퍼진 것이다."


사진집『A Casual Look: A photodiary of Football Fans 1980’s to 2001』에서


사진집『A Casual Look: A photodiary of Football Fans 1980’s to 2001』에서


여기까지는 캐주얼스에 대해 살펴보았으며, 지금부터는 7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영국의 사회 정세로 주제를 옮겨보자. 캐주얼스는 왜 고급 지향의 패션을 추구했으며, 음악이 아니라 축구와 패션이었을까. 사회 정세 속에서 노동자 계급이 무엇을 느끼고 캐주얼스를 구현했는지를 살펴보자.

캐주얼스가 태어난 시대의 영국 사회는 79년부터 90년까지 총리를 지낸 마가렛 대처의 정치 정책에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처 정부가 취한 긴축 재정은 많은 노동자 계급에는 커다란 시련이었다.

이전까지 영국에서는 충실한 사회 보장 제도가 노동자 계급을 지켜주고 있었다. 1945년 2차 세계 대전 종전과 함께 전승국이 된 영국은 1차 세계 대전 후의 빈곤 사회로 돌아가는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전쟁에서 돌아온 군인들은 평화와 일자리를 찾아 클레멘트 애틀리를 지지하였고, 노동조합이 기반이 되는 노동당이 집권하게 되었다. 애틀리 정부는 사회주의 노선에 따라 충실한 사회 보장 제도를 도입하였다. 국민 보험 서비스로 의료비는 무료였고, 정원이 있는 공공 주택을 저렴하게 임대해서 주거 환경을 개선했다. 또한, 탄광, 철도, 가스, 수도, 전력 등을 국유화하여 노동자 계급의 사람들에게 안정된 일자리를 제공했다.

이에 반해 대처는 작은 정부를 지향하고, 자유 경쟁을 촉진했다. 규제 완화와 민영화를 추진하여 복지 국가의 해체를 진행했다. 당시 노동자 계급은 몇 세대에 걸쳐 같은 직업에 종사한 것을 커다란 자랑거리로 여겼고, 그들의 정체성 형성에 큰 역할을 했다. 그러한 직종들이 민영화와 함께 줄줄이 사라지게 되었다. 노동조합은 각지에서 파업을 실행했지만 '철의 여인'으로 알려진 대처는 결코 이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던 탄광 노동조합까지도 완전히 자신의 손에서 주무른다. 1983년에 184개였던 탄광은 94년 민영화와 함께 15개까지 감소하였다.

이러한 사회 상황에 대해 딘은 "노동자 계급에는 매우 힘든 시기였다. 노동조합이 노동자를 지원하고는 있었지만, 대처 때문에 무너지고 말았다. 대처는 노동자 계급의 권리를 빼앗고, 어려운 상황에서 사는 사람들을 지원하기 위한 정부의 보조금마저도 삭감했다. 대처는 지금도 대부분의 노동자 계급과 좌파의 미움을 받고 있지만, 특히나 북부에서는 강한 증오의 대상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대처의 정책이 대체로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국민은 원치 않았지만, 정치가 바뀌면서도 그 유산은 지금도 남아있다. 게다가 외국의 많은 정치인이 대처를 존경하고, 그의 가치관을 많이 배우는 것으로 알고 있다. 대처는 지금도 증오의 대상이면서, 우익들에게는 영웅이다."라고 말했다.

마가렛 대처 정책이 좋고 나쁨을 제쳐두고, 대처 정권에 의해 노동자 계급이 궁지에 몰린 것은 사실이다. 탄광 산업이나 섬유 산업 등 노동자 계급이 종사하던 업종은 쇠퇴하고, 노동조합과 노동당의 관계는 악화하였다. 노동자 계급의 모든 문화와 정체성이 붕괴하는 가운데 유일하게 남겨진 것이 축구 문화였다.

지금까지 인종과 계급, 그리고 다양한 서브 컬쳐의 지지를 받는 프레드 페리와 캐주얼스에 의해 퍼진 스포츠 웨어 문화를 살펴보았다. 그것이 태어난 시대에 실행된 것이 바로 마가렛 대처의 긴축 재정이다.

다음엔 대처주의(대처리즘)로 인해 캐주얼스가 어떻게 변화했는가, 축구 문화가 어떻게 발전했는가. 또한, 영국은 90년대로 들어서며 어떻게 변화하는지 등 프레드 페리와 캐주얼스, 대처주의가 어떻게 얽혀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그리고 캐주얼스에 의해 퍼진 스포츠 웨어와 90년대의 스포츠 스타일의 관계에 대해서도 풀어갈 것이다.


클래식한 월계수 로고가 들어있는, 넉넉한 핏과 암홀이 특징인 아노락. 겉감은 신축성 고밀도 저지 소재를 사용하여 세련됨을, 안감은 기모감이 있는 소재를 통해 보온성을 고려하였다. FRED PERRY 공식 사이트 Art Work By Shinryo Saeki 자료 제공: Casual State of Mind


노동자 계급의 '캐주얼스'와 프레드 페리 02는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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